4월, 2026의 게시물 표시

G-셀프 (오픈런 후기, 백팩 설정, 토미노 메시지)

꼭두새벽에 지방에서 건담베이스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서 몇 시간을 줄 서서 산 프라모델이 생겼습니다. G-셀프, 기동전사 건담 G의 레코넥상스(G-레코)의 주역기입니다. 오픈런이 처음이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발매 당일 품절이 날 줄은 몰랐거든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오픈런 G-레코 극장판 블루레이까지 소장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번 10주년 기념 극장판 HG G-셀프는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방에 살다 보니 건담베이스(건베) 한정 제품은 사실상 언감생심이었다는 겁니다. 온라인에서 웃돈 주고 사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큰 마음 먹고 새벽에 차를 몰았습니다. 몇 시간을 기다려서 결국 손에 쥐었을 때의 그 감각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다시는 오픈런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들더군요. 지방 거주자에게 건베 한정 오픈런은 체력 소모가 상당합니다. 그 피로감이 설레임을 반쯤 잡아먹었습니다. 이번에 재발매된 HG는 기존 제품과 비교하면 완성도 차이가 확실합니다. 기존 HG G-셀프는 건담 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혹평을 받아온 키트입니다. 머리 곡면을 스티커로 처리하고, 흉부 덕트의 포톤 글러브(Photon Glove) 디테일도 생략되었으며, 가동 범위도 협소했습니다. 포톤 글러브란 불가시 티타늄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G-셀프의 외장재로, 배터리 기능이 내장된 동시에 팩 장착 시 색상이 투영되는 구조입니다. 쉽게 말해 G-셀프의 색깔 자체가 이 글러브에 이미지가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설정입니다. 그 중요한 파츠가 구형 HG에서는 그냥 생략되었으니, 당시 팬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됩니다. 반면 이번 극장판 HG는 포톤 글러브 부분을 투명 부품으로 재현하고, 가동성과 색 분할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습니다. 같은 기체가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새벽 운전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습니다. 7개의 백팩이 말해주는 G-셀프의 설정 G-레코를 방영 당시 ...

섬광의 하사웨이 (노스토스, 키르케, 신화적 결말)

『섬광의 하사웨이』는 단순한 건담 후일담이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의 구조를 의도적으로 뒤틀어 영웅의 귀환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비극입니다. 어릴 적 소설판을 읽으며 "제발 하사웨이만은 성공했으면"이라고 빌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다 읽고 나서야 그 바람이 처음부터 신화적으로 봉인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노스토스 — 돌아갈 수 없는 귀환의 서사 노스토스(Nostos)란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서 '영웅의 귀환'을 가리키는 문학적 개념입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그 전형으로,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이 핵심 서사입니다. 『섬광의 하사웨이』는 바로 이 노스토스의 구조를 차용합니다. 하사웨이가 지키려는 '지구'는 곧 그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며, 마프티 나비유 에린이라는 이름에도 '에린(Erin)'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습니다. 에린은 켈트 신화에서 지켜야 할 땅, 혹은 대지를 상징하는 여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노스토스는 '결국 돌아온다'는 희망의 서사로 읽힙니다. 제가 소설판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카라바도 에우고도 전부 실패하고 지구연방에 흡수된 이후, 하사웨이야말로 우주세기에 남은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작품이 보여주는 건 귀환이 처음부터 차단된 서사입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영웅의 길목에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을 단 적의 모빌슈트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연방군은 자신들의 시제 기체에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페넬로페는 크시 건담의 라이벌 기체이자 시제기이며, 신화 속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아내입니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그 이름은 하사웨이를 맞이하는 안식처가 아니라 그를 짓밟는 거대한 장갑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 이름 배치가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라 명백한 서사적 함정이라고 봅니다....

건담 엑시아 (디자인 철학, 세븐 소드, 리페어 시리즈)

2007년 처음 공개됐을 때, 엑시아는 기존 건담의 문법을 통째로 바꿔버렸습니다. 투박한 각진 실루엣 대신 근육과 힘줄을 모티브로 한 유선형 디자인이 등장한 순간, 저도 모르게 "이게 건담 맞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더블오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제일 멋진 기체가 뭐냐고 물으면, 저는 여전히 엑시아를 고릅니다. 디자인 철학: 왜 엑시아는 지금 봐도 안 낡았는가 엑시아의 이름은 능천사(能天使)의 그리스어 명칭에서 왔습니다. 능천사란 악과 직접 맞서는 최전방 천사를 뜻하는데, 무력 개입으로 전쟁을 멈추려는 솔레스탈 비잉의 집행자 역할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이름 하나에 기체의 존재 이유가 담겨 있는 셈입니다. 디자이너 에비카와 카네타케는 인체 해부학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어깨와 허리, 다리로 이어지는 보라색 GN 입자 전송 케이블이 핏줄처럼 배치돼 있고, 이것이 기체 전체에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인상을 줍니다. 여기에 클라비클 안테나(Clavicle Antenna)가 더해집니다. 클라비클 안테나란 어깨 부분에 장착된 입자 제어 장치로, GN 입자(GN Particle)를 정밀하게 분배해 기체의 자세 유지와 운동 성능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E-카본(E-Carbon) 장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E-카본이란 초고강도 복합 소재로, 기존 모빌 슈트 장갑 대비 경량이면서 방어력이 높은 소재입니다. 이마의 건담 각인과 흉부의 GN 드라이브 렌즈가 조합되면서, 엑시아는 단순한 병기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물처럼 보이게 됩니다. 제가 기억하는 엑시아는 아낙트로 처들어가 무차별하게 짓밟는 그 잔혹한 천사의 모습인데, 그 강렬함이 바로 이 디자인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건프라 기준으로는 솔직히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기본 상태는 디테일이 부족해서 손이 많이 가고, 다리 가동 구조가 애매해 포즈 잡기가 생각보다 불편합니다. 무장 연결부도 헐거운 편이라 완성도 면에서는 물음표가 붙습니다. 결국 디...

건담 비다르 (가엘리오, 아뢰야식, 스토리텔링)

졸작이라는 평가가 많은 작품인데, 오히려 그 점이 가장 현실적인 건담 아닐까요? 철혈의 오펀스를 처음 접했을 때 저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급발진 대사, 이상한 야쿠자 정치극, 갑작스러운 변절. 그런데 보다 보면 그게 오히려 이 작품의 색깔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 중심엔 건담 비다르와 가엘리오 보드윈이 있습니다. 가엘리오라는 캐릭터, 왜 진 주인공이라 불리는가 철혈의 오펀스 1기에서 가엘리오 보드윈은 솔직히 말해 주인공 미카즈키를 쫓아오는 장해물에 가까운 캐릭터였습니다. 걀라르호른 소속으로 철화단을 압박하고, 약혼녀와 친구였던 맥길리스에게 이용당하다가 결국 배신당해 죽음에 이르는 인물이죠. 가족, 지위, 친구를 모두 잃은 채 간신히 살아남아 2기에서 비다르로 돌아옵니다. 보통 이런 서사 구조에서 이 역할의 캐릭터는 중반에 죽거나 후반에 주인공 편으로 넘어오는 게 공식입니다. 그런데 가엘리오는 끝까지 미카즈키와 대적하는 쪽에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전개를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서사를 이렇게 몰아준 캐릭터가 주인공과 계속 부딪히니, 보는 입장에서 미카즈키가 오히려 악의 축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렌라간의 비랄이 끝까지 주인공과 적대하며 안티 스파이럴과 손을 잡고, 그게 결국 더 나은 결말을 이끈 것과 비슷한 구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렌라간은 그 구도가 감정적으로 납득이 됐고, 철혈은 그 과정에서 시청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죠.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이론에서 SF 장르는 캐릭터 중심 서사가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세계관이 방대해도 감정이입할 인물이 없으면 관객은 이탈한다는 것입니다. 우주세기 건담이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도 뉴타입(Newtype) 같은 복잡한 개념을 아무로와 샤아라는 인물의 성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죠. 뉴타입이란 인류가 우주 공간에 적응하며 새로운 감각과 능력을 갖게 되는 진화된 인간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철혈의 오펀스가 그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