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비다르 (가엘리오, 아뢰야식, 스토리텔링)

졸작이라는 평가가 많은 작품인데, 오히려 그 점이 가장 현실적인 건담 아닐까요? 철혈의 오펀스를 처음 접했을 때 저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급발진 대사, 이상한 야쿠자 정치극, 갑작스러운 변절. 그런데 보다 보면 그게 오히려 이 작품의 색깔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 중심엔 건담 비다르와 가엘리오 보드윈이 있습니다.

가엘리오라는 캐릭터, 왜 진 주인공이라 불리는가

철혈의 오펀스 1기에서 가엘리오 보드윈은 솔직히 말해 주인공 미카즈키를 쫓아오는 장해물에 가까운 캐릭터였습니다. 걀라르호른 소속으로 철화단을 압박하고, 약혼녀와 친구였던 맥길리스에게 이용당하다가 결국 배신당해 죽음에 이르는 인물이죠. 가족, 지위, 친구를 모두 잃은 채 간신히 살아남아 2기에서 비다르로 돌아옵니다.

보통 이런 서사 구조에서 이 역할의 캐릭터는 중반에 죽거나 후반에 주인공 편으로 넘어오는 게 공식입니다. 그런데 가엘리오는 끝까지 미카즈키와 대적하는 쪽에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전개를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서사를 이렇게 몰아준 캐릭터가 주인공과 계속 부딪히니, 보는 입장에서 미카즈키가 오히려 악의 축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렌라간의 비랄이 끝까지 주인공과 적대하며 안티 스파이럴과 손을 잡고, 그게 결국 더 나은 결말을 이끈 것과 비슷한 구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렌라간은 그 구도가 감정적으로 납득이 됐고, 철혈은 그 과정에서 시청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죠.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이론에서 SF 장르는 캐릭터 중심 서사가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세계관이 방대해도 감정이입할 인물이 없으면 관객은 이탈한다는 것입니다. 우주세기 건담이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도 뉴타입(Newtype) 같은 복잡한 개념을 아무로와 샤아라는 인물의 성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죠. 뉴타입이란 인류가 우주 공간에 적응하며 새로운 감각과 능력을 갖게 되는 진화된 인간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철혈의 오펀스가 그 역할을 온전히 해줄 인물로 가엘리오를 선택한 건 탁월한 판단이었지만, 그 배치 방식이 끝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건담 비다르의 아뢰야식, 그 잔인한 발상의 의미

건담 비다르는 단순한 전투 병기가 아닙니다. 기체 자체에 가엘리오의 서사가 설계 수준에서 녹아 있습니다. 베이스가 된 키마리스(ASW-G-66)는 보드윈 가문의 기체로, 가엘리오가 사망 처리된 후 가문이 비밀리에 개수한 것입니다. 형식번호를 XX로 숨겼는데, 카드 게임 자료에서 원래 번호가 그대로 노출되며 설정이 새어나가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비다르가 일반 건담보다 하나 많은 세 개의 아하브 리액터(Ahab Reactor)를 탑재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아하브 리액터란 건담 기체를 작동시키는 핵심 동력원으로, 고유 주파수를 발산해 기체의 정체를 역추적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세 번째 리액터는 평상시에 봉인되어 있고, 이를 해제하면 순간 출력이 폭발적으로 높아지지만 기체 붕괴 위험을 수반합니다. 복수에 매몰될 경우 스스로 파멸할 수 있다는 경고를 기체 설계 자체에 심어놓은 셈이죠.

비다르의 진짜 핵심은 아뢰야식 타입-E(Alaya-Vijnana Type-E)입니다. 아뢰야식이란 불교 유식 철학에서 모든 경험과 업(業)이 저장되는 심층 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 작품에서는 파일럿의 뇌 신호를 기체에 직접 전달해 건담을 신체의 연장처럼 제어하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수술 과정에서의 위험과 파일럿 신체에 가해지는 극심한 부담이 문제인데, 비다르는 생체 어뢰 아인 달튼을 이식해 그 부담을 분산시킵니다.

여기서 제가 이 작품을 다시 보게 만든 부분이 나옵니다. 아인은 이미 기계 부품화된 존재이므로 리미터를 해제해도 가엘리오의 몸에는 부담이 없다는 발상, 즉 사람을 예비 뇌처럼 활용한다는 논리가 설계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가엘리오는 아인을 부품이 아닌 전우로 대우합니다. 잔인한 시스템 위에서 인간적인 선택을 하는 캐릭터라는 점이, 철혈 특유의 냉혹한 현실감을 가장 잘 담아낸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프론트 미션의 B형 장치처럼 인간 신경계를 연산 장치로 쓰는 발상이 이미 SF에서 여러 차례 탐구된 주제이기도 하죠.

비다르의 무장 구성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110mm 라이플 및 전용 핸드건 2정 — 근·중·장거리 전투 대응
  2. 헌터스 엣지(Hunters Edge) — 다리에 내장된 전개식 블레이드로 적 장갑 파괴 특화
  3. 버스트 사벨 — 한 손에 장비하는 근접 타격용 무기
  4. 자상검 — 칼날 교체 및 적에게 박힌 후 분리 폭발 가능한 독특한 구조

베이스인 키마리스가 돌격 특화 기체인 만큼 비다르도 접근전에 강점이 있지만, 사격 장비로 약점을 보완한 균형 잡힌 구성입니다. 검을 뽑는 대신 장갑이 뒤로 밀려나는 구조는 디자이너 교부 잇페이, 에비카와 카네타케, 와시오 나오히로 등 여럿이 협업하며 탄생한 디테일로, 처음 봤을 때 꽤 인상 깊었습니다.

철혈의 오펀스, 졸작인가 오해받은 명작인가

건담 비다르의 명칭은 북유럽 신화에서 왔습니다. 북유럽 신화에서 비다르(Víðarr)는 오딘의 아들로, 라그나로크에서 늑대 펜리르를 죽이고 살아남아 정의의 신이 되는 존재입니다. 키마리스가 오딘의 상징을 지닌 보드윈 가문 기체라는 설정과 맞물리면서, 비다르라는 이름이 단순한 네이밍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 속 늑대는 바르바토스 루프스 렉스(Gundam Barbatos Lupus Rex)와 걀라르호른을 삼킨 맥길리스를 상징하고, 가엘리오는 그 늑대를 심판하는 정의로 기능합니다.

다른 건담들이 솔로몬의 72악마에서 이름을 따온 것과 달리 비다르가 북유럽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점은, 이 기체가 처음부터 가엘리오만을 위한 서사 장치로 설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깨어나다", "깨우치다"라는 어원적 의미도 순진했던 가엘리오가 배신을 통해 진실을 직시하고 일어서는 과정과 정확히 겹칩니다.

철혈의 오펀스가 호불호가 갈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두 개의 서사가 동시에 흐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카즈키라는 완성형 천재와 가엘리오라는 성장형 인물이 각자의 흐름을 갖고 전개되는 구조, 이는 마치 여러 히로인의 루트를 동시에 풀어가는 로맨스 코미디의 서사 공식과 유사합니다. SF 건담에서 이런 구조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미카즈키는 감정 변화가 거의 없고, 아라야식(Alaya-Vijnana) 반복 사용으로 신체가 점점 불구가 되어가면서도 그 모습이 오히려 괴물 같은 완성을 향해 간다는 인상을 줍니다. 리미터를 모두 해제한 마지막 전투에서 그를 저지하는 방법조차 비정상적인 수단으로만 가능하다는 설정은, 제가 모든 건담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현실에서 절망적인 전쟁의 감각을 담아낸 장면이라고 느꼈습니다. 철혈단의 아이들이 폭력의 도구로 소모될 뿐, 세계 변혁의 과실을 가져갈 수 없다는 결말은 냉혹하지만 그것이 이 작품이 다른 건담과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건담 시리즈의 역사와 세계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반다이 공식 건담 사이트(Gundam.info)에서 다양한 작품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사 구조와 캐릭터 분석의 이론적 배경이 궁금하다면 스토리텔링 관련 개념 자료도 참고해볼 만합니다.

MG 건담 비다르는 철혈의 오펀스 10주년 기념으로 발매되었고, 일본 설문에서는 프라우로스가 1위였음에도 비다르가 MG로 선택된 것은 서양권에서의 높은 인기와 역동적인 포즈 재현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제가 직접 완성된 비다르 모델을 봤을 때도, 저 디자인을 입체화하는 게 가능한가 싶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더군요.

2기에서 가엘리오의 비중을 초반부터 더 높이 가져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습니다. 그리고 미카즈키 중심으로 설계된 1기의 문법을 2기에서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엘리오 서사를 얹으려다 구조가 흔들린 것이 이 작품의 핵심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혈의 오펀스는 제타 건담과 함께 제가 가장 마음에 두는 건담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가엘리오 보드윈이라는 캐릭터와 건담 비다르라는 기체가 이 작품에 있는 한, 졸작이라는 딱지는 적어도 제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esWZdAIagn0

건담 비다르, 철혈의 오펀스, 가엘리오 보드윈, 기동전사 건담, 프라모델, 건담 스토리텔링, MG 건담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건담 F91의 기술혁신 (소형화, 베스바, 메탈피어)

백식의 진실 (샤아의 실력, 기체 성능, 모형 코팅)

데스티니 건담의 모든 것 (개발배경, 무장특징, 프라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