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광의 하사웨이 (노스토스, 키르케, 신화적 결말)
『섬광의 하사웨이』는 단순한 건담 후일담이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의 구조를 의도적으로 뒤틀어 영웅의 귀환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비극입니다. 어릴 적 소설판을 읽으며 "제발 하사웨이만은 성공했으면"이라고 빌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다 읽고 나서야 그 바람이 처음부터 신화적으로 봉인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노스토스 — 돌아갈 수 없는 귀환의 서사
노스토스(Nostos)란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서 '영웅의 귀환'을 가리키는 문학적 개념입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그 전형으로,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이 핵심 서사입니다. 『섬광의 하사웨이』는 바로 이 노스토스의 구조를 차용합니다. 하사웨이가 지키려는 '지구'는 곧 그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며, 마프티 나비유 에린이라는 이름에도 '에린(Erin)'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습니다. 에린은 켈트 신화에서 지켜야 할 땅, 혹은 대지를 상징하는 여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노스토스는 '결국 돌아온다'는 희망의 서사로 읽힙니다. 제가 소설판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카라바도 에우고도 전부 실패하고 지구연방에 흡수된 이후, 하사웨이야말로 우주세기에 남은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작품이 보여주는 건 귀환이 처음부터 차단된 서사입니다. 고향으로 향하는 영웅의 길목에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을 단 적의 모빌슈트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연방군은 자신들의 시제 기체에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페넬로페는 크시 건담의 라이벌 기체이자 시제기이며, 신화 속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아내입니다. 하지만 작품 안에서 그 이름은 하사웨이를 맞이하는 안식처가 아니라 그를 짓밟는 거대한 장갑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 이름 배치가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라 명백한 서사적 함정이라고 봅니다.
키르케 — 영웅을 타락시키는 세 가지 얼굴
키르케(Circe)는 그리스 신화의 마녀입니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신시켰으며, 오디세우스 본인에게는 굴복해 조력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키르케는 '인간의 이성을 짐승으로 끌어내리는 존재'이자 동시에 '영웅을 목적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을 상징합니다. 『섬광의 하사웨이』에는 이 키르케의 이미지가 최소 세 겹으로 겹쳐져 있습니다.
- 케네스 슬렉이 지휘하는 키르케 부대 — 마프티를 사냥하기 위해 조직된 연방의 특수 부대로, 연방의 관점에서 혁명가들을 '짐승의 난동'으로 규정하고 섬멸하려 합니다.
- 페넬로페 건담 자체 — 당시 기술 수준에서 거의 마법에 가까운 비행 능력을 보여주며, 특유의 기괴한 구동음은 '마녀의 비명'처럼 연출되었습니다. 거대한 흰색 장갑은 신화 속 페넬로페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지연시키기 위해 밤마다 풀어헤쳤던 수의(壽衣), 즉 죽음을 암시하는 천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기기 안달루시아 — 하사웨이와 케네스 두 남자의 이성을 동시에 흔들며, 직감적으로 상대의 거짓을 꿰뚫어 보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기기는 케네스에게 '승리의 여신'이라 불리지만, 실질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를 파멸로 이끕니다. 케네스는 기기 덕분에 하사웨이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인간적 우정을 나눈 친구를 직접 처형해야 했고 결국 연방에 환멸을 느껴 군복을 벗습니다. 기기가 하사웨이에게서 끌어낸 것은 혁명가의 의지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나약함과 욕망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적이자 동지'인 팜파탈 캐릭터는 흔히 낭만적으로만 소비되는데, 기기는 그 이중성이 결국 모두를 죽음으로 끌고 간다는 점에서 훨씬 냉혹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운젠(Hounsen) 호 — 하사웨이, 케네스, 기기가 처음 만나는 폐쇄된 공간입니다. '하운(Hound)'은 키르케가 변신시킨 인간, 즉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을 의미합니다. 연방의 고관들이 그 배에 가득 타고 있다는 설정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는 이 장치가 꽤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공간이 처음부터 마녀의 섬이었으니, 하사웨이의 운명은 이미 거기서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신화의 왜곡 —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을 빼앗긴 영웅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반전이 등장합니다. 연방은 자신들을 '질서'로, 마프티를 '오디세우스의 집을 어지럽히는 구혼자들'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체에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을 붙여 스스로를 진정한 영웅으로 선전합니다. 반면 하사웨이는 반역자로 격하됩니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은 레인 에임이라는 파일럿에게 돌아갔고, 하사웨이는 그 이름을 빼앗긴 채 '크시(Ξ)'라는 그리스 알파벳 기호만 남게 됩니다.
크시(Ξ)란 그리스 문자 체계에서 열네 번째 알파벳으로,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미지수나 특정 변수를 표기할 때 쓰이는 기호입니다. 연방의 신화 체계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이름, 정의되지 않은 존재의 기호. 하사웨이는 그 이름으로 자신의 고독한 반역 의지를 담은 셈입니다. 솔직히 처음 이 해석을 접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읽는 건 과도한 해석 아닌가?" 싶었는데, 실제로 오디세우스 건담이 크시를 막아서는 구도를 보면 이 이름 배치가 우연이 아님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조금 익숙한 분이라면 헤카테(Hecate)를 아실 겁니다. 헤카테는 횃불과 열쇠를 상징으로 쓰는 여신으로, 명계와 마법을 관장하며 키르케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힘을 빌어 잠시 명계에 하강해 트로이 전쟁에서 끝내 귀환하지 못한 전사자들과 만납니다. 저는 하사웨이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그가 명계에 다녀왔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한 또 하나의 영웅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로와 샤아라는 두 영웅의 신화가 상호 이해 없이 공멸로 끝났고, 그 이후를 이어받은 하사웨이의 여정도 미완으로 끝납니다. 분노를 노래하며 시작해 애도로 끝났어야 할 서사들이 모두 그렇게 봉인됩니다.
이 작품에 대한 학술적 분석은 퍼세우스 디지털 라이브러리(Perseus Digital Library)에서 오디세이아 원문과 함께 참조하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화 원전과 비교해 읽으면 작품 속 이름 배치가 얼마나 세밀하게 설계되었는지 체감하게 됩니다.
신화적 결말이 던지는 질문 — 폭력 이후의 공백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작품은 자연주의와 반(反)정치인 정서로 자주 읽힙니다. 제가 직접 여러 작품을 보면서 느낀 건, 토미노 감독이 단순히 "혁명은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가 비판하는 건 좀 더 구체적입니다. 썩은 체제를 향해 정당한 분노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다음을 설계하지 못한 폭력은 결국 공멸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샤아는 지구 생태를 지키겠다며 액시즈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그 이후 계획이 없었습니다. 하사웨이는 극도로 부패한 연방 고관들을 암살하며 테러를 벌이지만 그다음 그림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왜'는 있었지만 '그래서 어떻게'가 비어 있었습니다. 이 공백이 하사웨이를 처음부터 공감은 가되 동의할 수 없는 모순적 캐릭터로 설계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소설을 읽으며 내내 그의 편을 들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뉴타입(Newtype)이란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에서 인류가 우주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한 고도의 감각과 공감 능력을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아무로나 샤아처럼 전장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그 대표적 형태입니다. 하사웨이는 뉴타입으로 불리지만 그 수준은 아버지 브라이트 노아의 동료들에 비하면 현저히 낮습니다. 제 경험상 이 설정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처럼 읽힙니다. 뉴타입이라는 이름표가 있어도 진정한 상호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비극의 근원이라는 것.
코로나를 전후로 극단주의와 테러리즘 이슈가 반복적으로 터지는 시대에,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주세기의 신화는 영웅의 귀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인류의 방랑이라는 더 깊은 비극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것이 실패냐고 묻는다면,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웅은 답을 찾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3편은 소설판 전개대로 마프티의 몰락을 다룰 것입니다. 세부 결말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신화적 구조가 단순한 패배 서사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방의 잔스칼 전쟁 이후 붕괴까지 이어지는 우주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하사웨이의 실패조차 그 긴 질문의 일부였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작품을 처음 접한다면 소설판과 극장판을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면, 신화적 장치들이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ZHSaS2ky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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