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셀프 (오픈런 후기, 백팩 설정, 토미노 메시지)

꼭두새벽에 지방에서 건담베이스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서 몇 시간을 줄 서서 산 프라모델이 생겼습니다. G-셀프, 기동전사 건담 G의 레코넥상스(G-레코)의 주역기입니다. 오픈런이 처음이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발매 당일 품절이 날 줄은 몰랐거든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오픈런

G-레코 극장판 블루레이까지 소장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번 10주년 기념 극장판 HG G-셀프는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방에 살다 보니 건담베이스(건베) 한정 제품은 사실상 언감생심이었다는 겁니다. 온라인에서 웃돈 주고 사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큰 마음 먹고 새벽에 차를 몰았습니다.

몇 시간을 기다려서 결국 손에 쥐었을 때의 그 감각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다시는 오픈런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들더군요. 지방 거주자에게 건베 한정 오픈런은 체력 소모가 상당합니다. 그 피로감이 설레임을 반쯤 잡아먹었습니다.

이번에 재발매된 HG는 기존 제품과 비교하면 완성도 차이가 확실합니다. 기존 HG G-셀프는 건담 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혹평을 받아온 키트입니다. 머리 곡면을 스티커로 처리하고, 흉부 덕트의 포톤 글러브(Photon Glove) 디테일도 생략되었으며, 가동 범위도 협소했습니다. 포톤 글러브란 불가시 티타늄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G-셀프의 외장재로, 배터리 기능이 내장된 동시에 팩 장착 시 색상이 투영되는 구조입니다. 쉽게 말해 G-셀프의 색깔 자체가 이 글러브에 이미지가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설정입니다. 그 중요한 파츠가 구형 HG에서는 그냥 생략되었으니, 당시 팬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됩니다.

반면 이번 극장판 HG는 포톤 글러브 부분을 투명 부품으로 재현하고, 가동성과 색 분할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습니다. 같은 기체가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새벽 운전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습니다.

7개의 백팩이 말해주는 G-셀프의 설정

G-레코를 방영 당시 챙겨 봤던 건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G-셀프가 설정상 얼마나 강한 기체인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건담 강함 2위 후보로 손색없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단지 파일럿이 그 성능을 끝까지 쓰지 않을 뿐이지요.

G-셀프의 동력원은 포톤 배터리(Photon Battery)입니다. 일반적인 핵융합 반응로를 탑재한 모빌슈트와 달리, 기체 자체가 배터리 역할을 하는 구조로 별도의 리액터 없이 일주일간 가동이 가능합니다. 이는 턴A건담이나 턴X와 유사한 개념으로, G-레코의 배경인 리길드 센츄리(Regild Century, R.C.)가 우주세기 이후 2000년이 지난 시대라는 설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시대의 고급 기술 대부분은 '헤르메스의 장미'라는 고대 기록에서 유래하는데, G-셀프도 그 G 항목에 기록된 G형 모빌슈트입니다.

G-셀프의 가장 큰 특징은 총 7종의 백팩을 교체하며 상황에 대응하는 범용성입니다. 제가 직접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어트모스피어 팩: 미노프스키 플라이트 탑재로 대기권 내 비행 가능. 레이저 포드로 전방위 공격 지원.
  2. 스페이스 팩: 우주 전투용. 아메리아군이 헤르메스의 장미 데이터를 토대로 개발, G-셀프 전용 강력 추진력.
  3. 리플렉터 팩: 빔 흡수 및 I 필드 배리어(I Field Barrier) 전개 가능. I 필드 배리어란 빔 병기를 무력화하는 에너지 방어막입니다.
  4. 트리키 팩: 플래시 공격과 환각 패널을 이용한 교란 전용 장비. 기동성 저하로 단 한 번만 사용됨.
  5. 하이 토크 팩: 캐피탈 아미 제작 근접전용 팩으로 기동성 특화.
  6. 어설트 팩: 아메리아 개발 장거리 포격 팩. 대형 빔 캐논과 포톤 아이(Photon Eye) 정밀 사격 시스템 탑재.
  7. 퍼펙트 팩: 비너스 글로브 기술 기반의 최종 형태. 반물질 결정을 살포해 물질을 소멸시키는 포톤 어뢰(Photon Torpedo)를 무한 발사 가능.

포톤 어뢰란 반물질을 포함한 결정을 살포하여 물질을 에너지로 흡수·소멸시키는 무기입니다. 설정상 무한 발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기체가 작중 최강인 이유를 납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설정들을 알고 나서 다시 극장판을 보면, 벨리가 얼마나 이 기체의 성능을 억제하며 싸우는지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더군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이 훌륭한 설정들이 제대로 그려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50화 기획이 25화로 축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중간중간 전개가 뚝뚝 끊기는 느낌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수많은 메카들의 독창성과 다양성은 다른 어떤 건담 시리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데, 그 기체들이 충분한 활약 없이 스쳐 지나가는 건 보는 내내 아쉬웠습니다. 명장이 좋은 재료를 모았는데 냄비가 너무 작았던 느낌이라고 할까요.

토미노가 G-셀프에 담은 것

G-셀프의 외형은 삼색 배색의 건담이지만, 사실 기존 건담과는 결이 다른 디자인입니다. 개인적으로 G-레코는 색 배치만 건담이지 건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방영 때부터 했습니다. 블레이드 안테나는 곤충 더듬이에 가깝고, 흉부 덕트는 포톤 글러브로 덮여 있어 표정 있는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도된 낯섦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G-셀프는 꽤 잔혹한 기체입니다. 드라이브 레코더에 숨겨진 기능이 있고, 레이헌튼 가문의 혈통이 아닌 자에게는 자비가 없으며, 파일럿의 의지를 무시하고 AI가 독자 가동하기도 합니다. 레이헌튼 코드란 이 기체에 이식된 생체 인증 시스템으로, 혈통을 판별해 기동 권한을 부여하는 장치입니다. 주인공 벨리 제남이 G 메탈을 발급받아야 비로소 기체의 전 기능을 해제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토미노 감독이 G-셀프를 통해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는 '생명을 지키려거든 무기와 엮이지 말라'는 것으로 읽힙니다. 벨리는 끝까지 이 기체의 압도적인 힘에 도취되지 않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만 사용합니다. 결국 장기전으로 인해 포톤 배터리가 파괴되고 기능이 정지되자 코어 파이터로 탈출하는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의 결론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건담 시리즈의 역사를 다룬 건담 공식 포털(gundam.info)에서도 G-레코가 토미노 감독의 귀환작으로서 갖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턴A건담도 토미노 감독 작품이지만, 솔직히 저는 턴A가 좀 판타지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느낌에 개인적으로 그다지 친하지 않습니다. G-레코도 그 연장선에서 더 심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 작품이 가진 세계관의 밀도는 들여다볼수록 묵직합니다. 건담 시리즈 전체의 타임라인과 설정을 정리한 반다이 남코 필름웍스의 공식 건담 정보를 참고하면, G-레코가 우주세기와 턴A의 블랙 히스토리(Black History)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짚어볼 수 있습니다. 블랙 히스토리란 턴A 세계관에서 과거 모든 전쟁의 기록이 봉인된 역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G-레코의 기술적 유산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꼭두새벽 운전과 오픈런의 피로감은 이미 잊혔습니다. 손에 든 G-셀프 박스를 열면서 그때 느낀 건, 이 기체가 담고 있는 것들이 프라모델 이상이라는 감각이었습니다. G-레코가 세계관을 충분히 소화할 분량을 확보했더라면, 지금쯤 MG 라인업도 나왔을 것이고 이 기체를 모르는 건담 팬도 훨씬 줄었겠지요. 아직 G-셀프를 모르는 분이라면 극장판 버전부터 한번 챙겨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klZATw98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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