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DX (기체 성능, 작중 행적, 프라모델)

솔직히 저는 꽤 오랫동안 'DX'가 정식 명칭인 줄 알았습니다. 건담 더블 X, 즉 기동신세기 건담 X의 후기 주역기인 이 기체의 풀네임을 아는 사람 자체가 드물 정도로, 원작은 지금도 마이너 취급을 받습니다. 메시지도 묵직하고 기체 디자인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왜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걸까요.

기체 성능: 설정상 최강인데 왜 이렇게 덜 알려졌을까

건담 DX는 건담 X, 즉 GX를 베이스로 신 지구 연방의 기술진이 새로 설계한 기체입니다. GX를 단순 개수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는 점이 공식 설정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장갑재로는 루나 티타늄 합금이 쓰였는데, 루나 티타늄 합금이란 달에서 채굴한 티타늄 계열 소재로 기존 강철 계열 장갑 대비 훨씬 가볍고 단단한 것으로 설정된 소재입니다. 덕분에 방어력을 높이면서도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GX 대비 성능이 전방위로 향상되어 대기권 내 비행, 근접 격투, 원거리 포격까지 두루 소화하는 구성입니다. 고화력 노선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기체의 무장 목록을 처음 확인했을 때 꽤 흥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요 무장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트윈 세틀라이트 캐논: GX의 세틀라이트 캐논을 강화한 마크2를 두 자루 탑재. 위성에서 에너지를 수신해 발사하는 방식으로, 두 문을 동시에 쏠 수 있어 화력이 배가됩니다.
  2. 버스터 라이플: 화력과 연사력이 뛰어나면서도 경량화된 빔 소총. 다만 에너지 소비가 빠른 편입니다.
  3. 하이퍼 빔 사벨: 고출력으로 빔 블레이드를 일정 시간 유지할 수 있어 투척 무기로도 활용 가능합니다.
  4. GX 비트: 플래시 시스템을 통해 운용하는 12기의 무인 공격 드론. 압도적인 전멸 공격이 가능합니다.
  5. 브레스트 런처: 흉부에 장착된 다목적 실탄 런처로 다양한 탄두를 교체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플래시 시스템이란 유니버설 센추리, 즉 UC 계열 건담에 등장하는 사이코뮤와 유사한 뉴타입 전용 인터페이스입니다. 사이코뮤란 뉴타입의 뇌파를 기계 신호로 변환해 원격 병기를 직접 조종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를 뜻하는데, 플래시 시스템은 이것과 같은 원리로 GX 비트를 동시 제어합니다. 설정상으로는 역대급 스펙인데, 왜 실제로는 존재감이 묻혔을까요. 그 이유는 기체보다 이야기 쪽에 있습니다.

세틀라이트 시스템의 경우, 신 지구 연방에 뉴타입이 없어서 두 번째 GX 기체에서 이미 인증된 등록 데이터를 가져왔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에너지 수신과 냉각을 담당하는 등의 대형 리플렉터 패널 여섯 장과 팔다리의 에너지 라디에이터 블레이드가 그 상징적인 디자인 요소인데, 이 구조가 훗날 프리덤 건담의 날개 디자인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디자이너가 오오카와라 쿠니오라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작중 행적: 가로드는 왜 DX로 싸움을 피하려 했을까

DX가 처음 등장하는 건 22화입니다. 미완성 상태로 등장해 프리덴 일행을 압박하는 역할로 시작했고, 24화에서 가로드가 탈취하면서 본격적으로 주역기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정주행했을 때는 솔직히 티파한테 눈이 팔려서 가로드의 성장 과정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 두 번째 정주행에서야 가로드와 주변 캐릭터들의 서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DX를 넘겨받는 계기가 된 카토크의 죽음이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이 실수를 되풀이하지 마라"라는 유언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덧없는 증오로 이어지는 전쟁의 반복을 끊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가로드는 이 시점부터 적을 제거하는 것에서 나아가 전쟁 자체를 끝낼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세틀라이트 캐논을 적 부대가 아닌 섬 기지에 발사해 신연방군을 후퇴시킨 장면은 그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장 과정이 역설적으로 DX의 존재감을 희석시킵니다. 가로드는 의도적으로 세틀라이트 캐논 사용을 자제하려 하고, 그 때문에 경험 많은 신연방 에이스 파일럿들을 상대로 근접전에서 자주 고전합니다. 최종화에서 프로스트 형제를 겨우 이기지만 기체가 대파되는 연출까지 더해지면서, 설정상 최강인 기체가 "별로 강해 보이지 않는" 인상을 줬습니다. 제 생각에는 "부술 것을 다 부쉈으니 DX도 더는 필요없다"는 동귀어진 느낌의 연출을 의도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건담 X는 뉴타입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길을 여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시리즈입니다. 뉴타입이란 우주에서 생활하며 진화한 신인류를 지칭하는 건담 시리즈의 핵심 개념으로, UC 계열에서는 거의 특별 능력자 취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뉴타입 전용 시스템을 탑재한 기체를 올드 타입인 가로드가 몰면서, 건담의 상징성 자체를 무너뜨리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DX를 처음 탔을 때의 가로드가 아무로가 건담을 처음 탔던 그 장면과 겹쳐 보였던 건, 제가 그 구조를 무의식 중에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기동신세기 건담 X의 세계관 설정과 등장인물에 대한 더 자세한 자료는 건담 위키(Gundam Wiki)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프라모델: 30년 전 그 모형점과, 지금도 아쉬운 라인업

저는 30년쯤 전에 학교 앞 모형점에서 DX 프라모델을 처음 샀습니다. 당시에는 500원짜리, 1000원짜리 식완급 제품들과 확실히 달랐습니다. 스티커를 꽤 많이 써야 했지만, 날개 리플렉터가 펼쳐지고, 팔다리의 에너지 라디에이터 블레이드가 열리고, 등 뒤의 세틀라이트 캐논이 앞으로 전개되는 그 기믹이 당시 소년이었던 저한테는 충격이었습니다. "무장이 두 개나 등에서 나와?" 하는 그 순간의 흥분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지금 기준으로 DX 프라모델의 현황은 조금 아쉽습니다. HGAW(High Grade After War) 라인업이란 건담 X 세계관을 대상으로 한 고등급 프라모델 시리즈를 말하는데, 라인업 수 자체가 적고 DX는 백팩 구조 때문에 팔 가동 범위가 좁아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캐논 두 자루가 일체형으로 구성되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현재 기준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선택은 MG(Master Grade), 즉 마스터 그레이드 버전입니다. 마스터 그레이드란 1/100 스케일로 내부 골격까지 재현한 반다이의 고급 라인업을 뜻합니다. 다만 MG DX도 허리 고정 기믹이 없어서 세틀라이트 캐논을 전개한 자세를 유지하려면 액션 베이스 같은 스탠드가 필수입니다. 더 아쉬운 건 G-팔콘이 MG로 발매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G-팔콘이란 DX와 도킹해 화력과 기동성을 동시에 강화하는 지원 유닛인데, MG 라인업에서 빠져 있어 완전한 형태의 재현이 어렵습니다. 건담 프라모델 라인업 전반에 대한 공식 정보는 건프라 공식 사이트(Gunpla.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슈퍼로봇대전에서의 취급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슈퍼로봇대전이란 여러 로봇 애니메이션의 기체와 캐릭터가 교차 등장하는 시뮬레이션 RPG 시리즈입니다. 대부분의 시리즈에서 세틀라이트 캐논은 턴당 한 번 사용 제한이 걸려 있고, 일부 작품에서는 티파가 파티에 없으면 아예 쓸 수 없게 막혀 있어서 게임 내에서도 활약이 제한됐습니다. 3차 Z 천옥편에서 드디어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줬을 때 팬들 사이에서 "이제 와서?"라는 반응이 나온 게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망한 작품에 얹혀 망해버린 최강 기체라는 평가가 이런 역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건담 DX는 설정상으로는 역대급 화력과 만능에 가까운 성능을 갖춘 기체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힘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주인공의 성장을 그리려 했던 작품의 연출 방향이 기체의 존재감을 스스로 지워버렸습니다. 그 전략적 선택이 작품 메시지를 강화한 건지, 아니면 기체의 매력을 희생시킨 건지는 지금도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기동신세기 건담 X에 아직 손을 대지 않으셨다면, 한 번쯤은 가로드의 시점으로 끝까지 정주행해 보시길 권합니다. 두 번째 정주행에서 보이는 것들이 다릅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mFBlm4ZU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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