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전형 건담 (방패쏴 논란, EZ-8 개조, 프라모델 상술)

저도 처음 08MS소대를 봤을 때 육전형 건담이 방패에 180mm 캐논을 얹어 쏘는 줄 알았습니다. 오프닝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런데 본편을 다시 보니 실제로는 그런 장면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더라는 겁니다. 방패와 캐논은 따로 놓여 있었고, 오프닝은 단지 반동으로 움직이는 포신이 방패 뒤편과 겹쳐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오해가 G제네레이션 게임에서 전투 모션으로 재현되면서 공식 설정처럼 굳어져 버렸고, 지금은 모든 일러스트와 프라모델에서 비효율적인 '방패쏴' 자세가 육전형 건담의 시그니처가 되어버렸습니다.

B급 부품으로 탄생한 양산형 건담

육전형 건담은 1996년 OVA '기동전사 건담: 제08MS소대'의 주역 기체로, RX-78 건담의 기준 미달 부품을 활용해 만든 양산형 기체입니다. 여기서 '육전형'이란 육지전(陸地戰)의 약자인데, 한국어로는 '지상전 건담'이 더 정확한 번역이지만 이미 육전형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원래 제작진은 건담 없이 짐과 자쿠만으로 전쟁을 그리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OVA라는 상품 특성상 건담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판매에 유리했고, 결국 건담을 등장시키되 무쌍 영웅이 아닌 현실적인 병기로 그리는 방향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V 작전 당시 발생한 RX-78의 잉여 부품, 즉 성능 테스트는 통과했지만 정식 채택에는 미달한 B급 부품들을 모아 중력 하 테스트용 기체를 만든 것이 육전형 건담의 시작이었습니다.

제작 대수는 매체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오지만 대략 20대 내외로 추정되며, 대부분 코지마 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파워 트레인(동력 전달 장치)과 드라이브 트레인(구동 계통), 전기 계통은 재활용 부품을 썼고, 외장과 장갑, 프레임만 새로 설계했습니다. 코어 블록 시스템은 폐지되었지만 제너레이터 출력은 RX-78과 동일하며, 장갑 재질 역시 루나 티타늄 합금을 사용했습니다.

재활용 부품 특성상 기체마다 성능 편차가 발생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소프트웨어로 출력을 제한하는 리미터가 장착되었습니다. 리미터를 해제하면 'MAX 모드'로 고성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부품 과열로 인해 기체가 결함 상태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부품 공급이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지상 전투형 부품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정점이 바로 EZ-8입니다.

오프닝이 만든 전설, 카가야이테의 탄생

육전형 건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방패쏴' 논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프닝에서 180mm 캐논을 발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반동으로 포신이 움직이면서 방패 손잡이 뒤쪽과 겹쳐 보이는 컷이 있습니다. 이게 마치 방패에 캐논을 얹어 쏘는 것처럼 보였고, G제네레이션 게임에서 이 장면을 전투 모션으로 재현하면서 완전히 공식화되어 버렸습니다.

문제는 본편 어디에도 그런 사격 자세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도 확인차 다시 봤는데, 캐논을 쏠 때는 항상 방패를 따로 두거나 아예 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프라모델 제작사 입장에서는 오프닝의 인상적인 장면을 재현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HGUC 육전형 건담부터는 방패에 캐논을 거치할 수 있도록 방패 크기를 키우고, 원작에 없던 바이포드(양각대) 부품까지 추가했습니다.

일본 건담 팬들 사이에서는 오프닝 주제가 'Arashi no Naka de Kagayaite(폭풍 속에서 빛나줘)'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카가야이테(빛나줘)' 가사가 나올 때 문제의 사격 장면이 나와서, 지금은 '카가야키'라고만 하면 육전형 건담의 '그 자세'를 뜻하는 일종의 밈이 되었습니다. 설정보다 시장성을 택한 선라이즈의 정책이 만든 아이러니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EZ-8, 전장에서 태어난 커스텀의 정석

시로 아마다의 육전형 건담은 압사라스 2와의 전투에서 대파되었고, 이후 자쿠와 짐의 부품을 활용해 개조된 기체가 바로 EZ-8입니다. 'Extra-zero-8'의 약자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M4A3E8 셔먼 전차의 애칭 'Easy Eight'에서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EZ-8을 짐의 부품을 활용한 결정체라고 설명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부분이 다소 애매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작중에서는 대파된 시로의 건담을 개수하기 위해 자쿠의 부품과 장갑을 사용했다는 언급이 나오지, 짐 이야기는 그다지 나오지 않습니다. 내부 프레임에 일부 들어갔을 수는 있지만, 육전형 짐의 부품을 활용했다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카렌의 육전형 건담이 짐 머리를 부착한 것을 보는 편이 더 명확한 사례겠죠.

EZ-8의 주요 개조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마 안테나를 로드 안테나로 변경하고 멀티 런처 제거
  2. 위험한 설계였던 기존 발칸포를 제거하고 머리에 새로운 발칸건 설치
  3. 약해진 헤드 발칸을 보완하기 위해 가슴에 12.7mm 대인 회전식 발칸건 추가
  4. 덕트와 흡기구를 장갑으로 덮고 관절 노출 최소화

단순 개조기가 아니라 시로의 의견을 반영해 육전형 건담의 문제점을 실전에서 개선한 사실상 커스텀 기체입니다. 내구성과 유지보수성은 향상되었지만, 전선에서의 응급 개조였던 만큼 일부 성능은 오히려 저하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EZ-8은 '완성된 기체'라기보다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기체'에 가깝습니다.

프라모델 상술의 교과서

육전형 건담과 EZ-8의 프라모델 구성은 건프라 상술의 대표 사례로 꼽힙니다. HGUC 라인에서 두 기체를 발매했는데, 원가 절감인지 디자인 문제인지 개선점과 퇴보점이 공존하는 기묘한 구성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두 제품을 모두 구매해야만 완전한 장비 구성을 갖출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육전형에는 180mm 캐논과 컨테이너가, EZ-8에는 낙하산 팩이 들어있어서 둘 다 원하면 두 개를 사야 합니다. 더 황당한 건 옵션인 발칸 포드와 로드 안테나는 HGUC에 아예 없어서 구판 HG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점입니다.

MG는 더 심합니다. 육전형에는 캐논만, EZ-8에는 바주카만 포함되어 있어서 모든 장비를 갖추려면 육전형, EZ-8, 그리고 별도 장비 세트까지 총 3개 제품을 구매해야 합니다. 반다이 입장에서는 매출 극대화 전략이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구성입니다.

신형 EZ-8 모델에서는 구형에 있던 낙하산 벨트 모형이 스티커로 대체되는 등 오히려 퇴보한 부분도 있습니다. 1/35 U.C. 하드그래프 세트에서는 팔만 플라스틱 모델로 존재하는 기묘한 상황도 있었고요. 이런 걸 보면 건담 설정만큼이나 프라모델 구성도 상업적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육전형 건담은 건담 시리즈 중에서도 밀리터리적 면모를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무적의 영웅이 아닌, 장비를 활용하는 병사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고, MSV와 우주세기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설정 충돌과 상업적 변경은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잉여 파츠로 만든 기체라는 설정 자체가 나름의 현실 고증이었다고 봅니다(출처: 건담 공식 포털). 건담 애니메이션 자체가 '건담'이라는 작품인 동시에 '건프라 홍보 영상' 성격이 강하다 보니 이런 논란이 크게 작용한 것이고, 작품만 놓고 봤을 때는 08MS소대는 상당히 잘 만든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패쏴 논란도, 프라모델 상술도, 결국은 이 작품이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반증 아닐까요.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ntNozbSK08
육전형 건담, 08MS소대, EZ-8, 건담 프라모델, 방패쏴, 카가야이테, 건담 설정 논란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건담 F91의 기술혁신 (소형화, 베스바, 메탈피어)

백식의 진실 (샤아의 실력, 기체 성능, 모형 코팅)

데스티니 건담의 모든 것 (개발배경, 무장특징, 프라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