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데스사이즈 (스텔스 전술, 듀오 맥스웰, EW 버전)
건담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전술 개념을 탑재한 기체가 뭐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주저 없이 데스사이즈를 꼽습니다. 1995년 신기동전기 건담W에 등장한 이 기체는 하이퍼 재머(Hyper Jammer)라는 스텔스 재밍 장치를 장착해 레이더 포착을 회피하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콘셉트를 구현했습니다. 빔 사이즈라는 거대한 근접 무기를 들고 사신처럼 적진을 휘젓는 모습은 90년대 건담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스텔스 전술을 탑재한 건담의 설계 철학
건담 데스사이즈는 오퍼레이션 메테오(Operation Meteor)를 위해 개발된 5대의 건담 중 하나로, 오즈(OZ)로부터 'O2'라는 코드명을 부여받았습니다. 파일럿은 '사신' 듀오 맥스웰이죠. 원래 오퍼레이션 메테오는 콜로니를 지구에 떨어뜨려 대규모 살상을 벌이는 극단적 작전이었으나, 파이브 닥터와 건담 파일럿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건담 5대를 지구에 강하시켜 거점을 각개격파하는 전술로 변경됩니다.
데스사이즈의 설계 철학은 개발자 G 교수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건다늄 합금(Gundanium Alloy)으로 만들어진 장갑은 일반 모빌슈트보다 훨씬 튼튼하지만, 단독 행동이 많은 만큼 집중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듀오는 적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전투 스타일을 구사합니다. 높은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량화를 추구했지만, 이 때문에 다른 건담들에 비해 출력 대비 효율이 다소 떨어지는 약점도 생겼습니다.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바로 하이퍼 재머와 특수 스텔스 페인트입니다. 하이퍼 재머는 강력한 교란 전파를 발생시켜 적의 레이더 탐지를 무력화하는 ECM(Electronic Counter Measures) 장치로, 쉽게 말해 전자전 능력을 극대화한 시스템입니다. 여기에 검은색 스텔스 페인트를 덧칠해 시각적 탐지마저 어렵게 만들었죠. 제가 처음 데스사이즈를 봤을 때 느낀 건 '이게 진짜 현대전에 가장 가까운 건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스텔스 기능 하나만으로도 장거리 폭격이나 거리 조절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데, 정작 장비는 근접 무기뿐이라는 게 아이러니했지만요.
듀오 맥스웰, 사신이라 불린 파일럿의 과거
건담W의 다섯 파일럿은 모두 같은 목표를 공유했지만, 각자의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히이로 유이는 냉혹한 임무 수행자였고, 트로와 바톤은 과묵한 저격수였죠. 그 사이에서 듀오 맥스웰은 유일하게 시원시원하고 붙임성 있는 인싸 성격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성격에 하나같이 문제가 많은 건담 파일럿 중에서 손해 보면서도 히이로를 돕는 미워할 수 없는 친근감을 주는 캐릭터였죠.
듀오는 이름 없는 고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친구 솔로의 죽음을 겪으며 '듀오'라는 이름을 짓고 '항상 함께'라는 의미를 되새깁니다. 맥스웰 교회에서 신부와 수녀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으나, 반정부 테러리스트와의 교전 중 교회가 불타고 두 사람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후 G 교수를 만나 건담 파일럿이 된 듀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은 것이 자신이 '사신'이기 때문이라 믿으며,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하죠.
흥미로운 건 듀오가 끊임없이 '사신' 드립을 치면서도 중2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라오라 사신님 나가신다~~!" 같은 대사를 날려도 주변에 워낙 이상한 애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정상으로 보였던 거죠. 성우 세키 토시히코의 블리드 카가처럼 곁에 있으면 기분 좋은 형제 같은 연기도 한몫했습니다. 4컷 개그 밈이긴 했어도, 듀오는 건담W라는 작품에 필요한 밸런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EW 버전으로 진화한 데스사이즈 헬의 디테일
데스사이즈는 HLV(Heavy Lift Vehicle) 탈취 작전 중 오즈에게 발각되어 파괴됩니다. 우주용으로 개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서 싸우다 결국 자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트로와 바톤에 의해 파괴되는 장면이 방송되죠. 하지만 다섯 박사들은 데스사이즈의 잔해를 확보해 달 기지에서 우주용으로 개조하고, 여기에 바이에이트(Vayeate)와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기술을 적용해 ECM 스텔스와 방어력을 대폭 강화한 데스사이즈 헬(Deathscythe Hell)을 탄생시킵니다.
'HELL'이라는 이름은 지옥에서 돌아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트윈 빔 사이즈(Twin Beam Scythe)와 액티브 클록(Active Cloak)이 추가됩니다. 액티브 클록은 필드 생성기(Field Generator)를 포함한 방어막으로, 대형 빔 캐논의 직격탄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필드 생성기란 일종의 에너지 장벽을 형성하는 장치로, 빔 무기를 상쇄하거나 약화시키는 기술입니다. 여기에 스텔스 페인트로 코팅되어 방어와 스텔스 성능이 동시에 향상되었죠.
OVA 엔드리스 왈츠(Endless Waltz)에서는 카토키 하지메가 디자인을 변경한 EW 버전이 등장합니다. 초기엔 '커스텀'이라 불렸으나 현재는 '건담 데스사이즈 헬 (EW 버전)'으로 불리죠. 빔 사이즈는 빔 시저스(Beam Scissors)로 이름이 바뀌고, 버스터 실드가 사라지면서 디자인이 한층 단순해졌습니다. 슈퍼로봇대전 시리즈에서는 실드가 없다는 점이 단점으로 작용했고, 발칸이 유일한 사격 무장이었죠. 이후 'Glory of the Losers'에서는 호넷이라는 사출 무기가 추가되었고, 빔 시저스에 에너지 팩이 내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액티브 클록도 외날개 형태로 변경되었는데, 닫혀 있을 때 팔 움직임에 제약이 있어 전투 시에는 열어야 했습니다. 하이퍼 재머는 리브 재머(Rib Jammer) 추가로 훨씬 강력해져 레이더 포착이 거의 불가능해졌죠. EW 마지막 장면에서 듀오가 트로와와 함께 자폭을 생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프리벤터 윈드로 등장한 제크스 마키스에게 루크레치아 노아가 "당신과 함께 죽을 수 있어서 영광이다"라고 말하는 장면도 진짜 감동이었습니다. 만월을 배경으로 한 특공 장면은 '각인'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명장면이었죠.
프라모델 상품화 히스토리와 컬렉터의 시각
건담 데스사이즈와 데스사이즈 헬의 상품화 과정은 건담 프라모델 역사에서도 흥미로운 챕터입니다. 구형 키트의 품질은 솔직히 좋지 않았고, 1/100 HG 데스사이즈 헬은 날개가 처지는 문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MG EW 버전은 일반판으로 출시되었으나, 당시 반다이의 사출 성형 기술 문제로 인해 소비자들이 구매를 망설였죠. 제가 처음 만든 건담이자 처음 부숴먹은 건담이 바로 이 녀석이었습니다. 사신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저에겐 최고의 건담이었지만, 1/100 커스텀 버전을 만들면서 꼼지락거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HGAC 데스사이즈는 빔 사이즈 드라이브와 버스터 실드의 복잡한 구조가 잘 재현되어 품질이 뛰어났습니다. TV 버전 데스사이즈 헬은 1990년대 이후로 거의 볼 수 없었으나, 2023년 5월 HGAC 데스사이즈 헬이 한정판으로 출시되었죠. 데스사이즈 헬 (EW)와 윙 제로 (EW)는 인기가 많아 2023년 GUNDAM FIX FIGURATION METAL COMPOSITE 라인으로 카토키 하지메 어레인지 버전이 출시되기도 했습니다.
이 제품은 다음과 같은 독창적인 기믹을 갖추고 있습니다(출처: 반다이 공식 홈페이지):
- 사신 모드: 액티브 클록을 펼친 기본 전투 형태
- 레이븐 폼: 빔 시저스를 접은 비행 형태
- 아들러 장비: 추가 무장을 장착한 강습 형태
- 비크 모드, 타롱 모드, 플뤼겔 모드 등 다양한 변형 형태
개인적으로 데스사이즈 헬의 날개 기믹을 처음 봤을 때 사탄 건담이 생각나서 은근히 친근감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가 데스사이즈 헬을 개조해서 등신대 사탄 건담을 만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죠. 어떤 의미에선 스텔스 기능 하나만으로 건담W의 모든 건담 중에 가장 현대적 전술을 쓸 수 있는 건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런 전술 개념과 달리 근접 기술만 가득한 게 아이러니하지만요.
엔드리스 왈츠 결말에서 듀오는 자폭을 생각했으나 쿼트르의 설득으로 포기하고, 전쟁의 불길을 막는다는 목적 달성 후 건담을 자폭시킵니다. 이후 힐데와 함께 고물상으로 평범하게 살아가죠. 소설판 후속작 'Frozen Teardrop'에서는 맥스웰 신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원작과 너무 다른 인물로 그려져 힐데를 고생시키는 바람에 팬들의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저도 프로즌 티어드롭 버전 듀오는 듀오 같지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건담W는 비우주세기물 중에서도 전설적인 작품입니다. 그 전에 나온 비우주세기 건담들은 영 작품성이 떨어졌는데, 건담W는 영상미부터 효과음, 주제곡까지 당시 팬들에게 와우 하고 감탄사를 보낸 작품이었죠. "그 정도까지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늦게 건담에 입문했거나 젊은 층입니다. 90년대 건담W를 실시간으로 본 사람들에게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고, 그 시대 그 퀄리티의 건담은 정말 소름이었습니다. 데스사이즈는 그 시대의 상징이자, 히이로에게 좋은 건담 부품 창고 노릇을 하면서도 끝까지 사랑받은 기체로 남아 있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bQc8TLtKLY 건담 데스사이즈, 건담W, 듀오 맥스웰, 데스사이즈 헬, 건담 프라모델, 신기동전기 건담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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