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아스트레이 레드프레임 (로우 귤, 게르베라 스트레이트, 프라모델)

2002년 외전 만화로 처음 등장한 건담 아스트레이 레드프레임은 단 한 편의 OVA를 제외하고 영상화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프라모델 매장에 가보면 프리덤보다 이 붉은 기체가 더 많이 진열돼 있었습니다. 어릴 적 저는 "영상에도 안 나온 기체가 왜 이렇게 인기지?" 하고 의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알고 보니 이 기체에는 본편 주인공 기체들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로우 귤이 만들어낸 코디네이터 없는 건담 신화

건담 시드 세계관에서 MS(Mobile Suit)란 기본적으로 코디네이터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내추럴이 조종하기엔 OS(Operating System) 자체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레드프레임의 파일럿인 로우 귤은 내추럴임에도 보조 AI '8(하치)'을 연동시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쉽게 말해 내추럴도 충분히 건담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로우는 정크 딜러(Junk Dealer)라는 직업으로 등장합니다. 정크 딜러란 전쟁으로 파괴된 메카닉을 수리하고 판매하는 일종의 청소부 겸 기술자를 뜻합니다. 전쟁이 한창인 우주 콜로니 헬리오폴리스가 크루제 일당의 습격으로 붕괴되는 순간, 로우는 잔해 속에서 황금색 팔과 두 대의 아스트레이를 발견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레드프레임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설정부터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본편 주인공들처럼 거창한 운명이나 혈통이 아니라, 그냥 청소하다가 우연히 건담을 줍는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했습니다. 로우는 블루프레임을 용병 가이에게 넘기고 레드프레임의 파일럿이 되는데, 이때부터 이 기체는 로우의 손을 거치며 점점 독특한 방향으로 진화합니다.

게르베라 스트레이트와 150미터 일본도의 낭만

레드프레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게르베라 스트레이트'라는 검입니다. 대부분의 건담이 빔 라이플과 빔 사벨 같은 에너지 무기를 쓰는데, 로우는 에너지 소비 없는 실체 검을 선택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레드프레임에는 PS 장갑(Phase-Shift Armor)이 없어서 에너지 효율을 최대한 아껴야 했기 때문입니다. PS 장갑이란 전기 신호로 장갑의 분자 구조를 변화시켜 물리 공격을 무효화하는 기술인데, 에너지 소모가 극심합니다.

게르베라 스트레이트는 원래 '키쿠이치몬지'라는 일본도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Gundam Wiki). '게르베라(국화)'와 '스트레이트(一자)'를 합친 말장난인 셈입니다. 로우는 이 검을 얻기 위해 검사 운 노를 만나 검술까지 배우는데, 이 과정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MS 조종 프로그램에 검술 동작을 입력해서 실제 일본도 휘두르듯 싸우는 장면은 다른 건담 시리즈에서는 보기 힘든 연출이었습니다.

  1. 게르베라 스트레이트: 빔을 벨 수 있는 실체검으로, 로우의 주무장
  2. 타이거 피어스: 운 노 전용 무기를 추가로 장착해 이도류 구성
  3. 150 게르베라(게르베라 스트레이트 2): 150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검으로, 콜로니도 벨 수 있는 파괴력

제 경험상 건담 프라모델을 조립하면서 가장 설레는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이 게르베라 스트레이트를 장착할 때였습니다. 특히 구판 HG 키트에 들어있던 도금 처리된 칼날은 신판 스티커 버전보다 훨씬 간지가 났습니다. 그래서 신판을 사면서도 구판 칼만 따로 구해서 쓰는 게 유행이었죠.

프라모델 라인업과 MG의 전설

아스트레이 레드프레임은 MG(Master Grade) 라인업 중에서도 역대급 판매고를 기록한 제품입니다. 신작 인기 MS가 나올 때마다 잠깐 2위로 밀리지만, 금방 다시 1위를 탈환하는 괴물 같은 판매력을 보여줍니다. 저도 처음 MG로 조립했을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프레임이 노출된 디자인 덕분에 조립 과정 자체가 메카닉을 만드는 듯한 쾌감을 줬습니다.

다만 MG는 '택티컬 암즈 II L'이라는 거대한 장비가 탑재된 카이 버전으로 출시됐는데, 이 등짐 때문에 뒤로 넘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택티컬 암즈란 V폼, 소드폼, 애로우폼, 워크폼, 플라이트 폼으로 변형 가능한 다목적 장치로, 미라쥬 콜로이드(Mirage Colloid)와 로엔그린 캐논까지 장착된 만능 무기입니다. 미라쥬 콜로이드란 빛을 굴절시켜 기체를 투명하게 만드는 스텔스 기술을 의미합니다. 제 생각엔 이 무기가 너무 욕심을 부린 설계였던 것 같습니다. 스탠드 전시는 멋있지만 손에 들고 포즈 잡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PG(Perfect Grade)는 스트라이크 건담의 부품을 재활용한 탓에 평가가 좋지 않았습니다. 장갑이 몸통에 접착돼 가동이 제한되고, 조립 후 남는 정크 부품도 많았습니다. 현재는 한정판으로만 나와서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반면 HiRM(High Resolution Model)은 파워드 레드 버전으로 나왔는데, 윙 건담 제로의 악평과 달리 최고 품질을 자랑합니다. 다만 원래 디자인이 근육질로 바뀐 점은 호불호가 갈립니다.

HG(High Grade)는 2013년 출시된 플라이트 유닛 장비 타입이 신금형으로 나와 최고의 가동성을 보여줍니다. 'All GUNDAM Project'의 일환으로 트리거 울(빔 라이플)이 제거됐는데, 어차피 팬들은 게르베라 스트레이트만 신경 쓰다 보니 불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로 로우도 사격보다 검술에 특화된 캐릭터라 빔 라이플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로우와 레드프레임의 이야기는 본편의 미싱 링크(Missing Link)를 채우는 역할도 했습니다. 미싱 링크란 이야기의 빈틈이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을 뜻하는데, 로우는 키라 야마토가 자폭하려 할 때 구해주고, 아크엔젤에 식량과 탄약을 보급하는 등 본편의 의문점들을 자연스럽게 해결해줍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싶었던 장면들이 사실은 로우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설정이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후반부 강화폼 디자인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덕지덕지 무기와 장비를 달아놓은 형태가 초반의 깔끔한 실루엣을 해쳤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로우가 타고 다니는 모빌슈트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긴 합니다. 또한 일부 시각에서는 본편보다 인기 많은 외전에 질투를 느낀 작가가 아스트레이 3인방을 죽여버렸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실제로 안경 쓴 파일럿이 중요한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강제로 수정됐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정크 길드에서는 코디네이터와 내추럴의 차별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씁쓸합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함께 정크를 모으다 보니 자연스레 공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차별을 멈춘다는 점이 아이러니했습니다. 로우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인류는 다 같이 공존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쟁탈하다 모두 죽을 것인가.

로우는 스스로를 '정비공'이라 칭하며, 건담을 살육이 아닌 평화를 지키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는 무기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내추럴과 코디네이터를 차별하지 않고, 심지어 적까지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인물입니다. 존 그렌 함장은 그를 'ASTRAY', 즉 정도를 걷지 않는 진정한 코디네이터로 평가했습니다. 제 생각에 레드프레임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멋진 디자인 때문만이 아니라, 로우라는 캐릭터가 주는 따뜻한 메시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프레임이 노출된 종이장갑 기체지만, 그 안에는 로우의 신념과 기술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건담 시드를 넘어 다른 시리즈 팬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fwB6nJx46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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