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란 자라 (샤아 오마주, 이지스 건담, 고뇌하는 라이벌)

건담 SEED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주인공 키라보다 아스란 자라에게 더 몰입했습니다. 중반부에 니콜이 죽고 각성한 아스란이 친구였던 키라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그 장면, 그리고 이지스와 함께 자폭하던 순간의 절규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왜 이 캐릭터는 키라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을까요? 그 답은 아스란이 '샤아 아즈나블'이라는 건담 역사상 가장 복잡한 라이벌 캐릭터의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토미노 감독이 Z건담에서 "아무로의 이야기는 끝났다"며 샤아의 서사를 중심에 놓았던 것처럼, SEED에서도 아스란의 시선으로 스토리를 따라가면 전체 맥락이 훨씬 명확하게 보입니다. 제 경험상 SEED를 두 번째 볼 때는 아스란 중심으로 보는 게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샤아 아즈나블의 후예, 아스란은 누구인가

아스란 자라는 단순한 라이벌이 아닙니다. 그는 코즈믹 이라(Cosmic Era) 세계관에서 샤아 아즈나블의 역할을 고스란히 계승한 캐릭터입니다. 퍼스트 건담의 '가면을 쓴 라이벌 샤아'는 SEED에서 라우 르 크루제로, '주인공의 라이벌 샤아'는 아스란으로 나뉘어 재해석되었습니다.

아스란의 전용기는 샤아처럼 붉은색이고, 시드 프리덤에서는 샤아의 전용기 즈고크를 오마주한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아스란이 알렉스 디노라는 가명으로 연설하는 장면인데, 이는 Z건담에서 샤아가 다카르 연설을 하던 장면의 직접적인 오마주입니다(출처: Gundam Wiki).

저는 SEED를 보면서 아스란이 라크스를 빼앗기고 갈라서는 부분에서 샤아와 라라 순의 비극이 겹쳐 보였습니다. 속편에서 콰트로 바지나 역할을 맡는 것도 그렇고, 아스란은 샤아의 서사 구조를 21세기 버전으로 재해석한 캐릭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만 샤아와 달리 아스란은 끝까지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차이점이죠.

이지스 건담, 변신하는 지휘관기의 아이러니

GAT-X303 이지스 건담은 그리스 신화의 '신의 방패 아이기스(Aegis)'에서 이름을 따온 기체입니다. 이지스는 지휘관용 MS(Mobile Suit, 모빌슈트)로 개발되었으며, 가변 프레임(Variable Frame)을 채택해 모빌아머 형태로 변형이 가능합니다. 가변 프레임이란 로봇이 다른 형태로 변신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골격 구조를 뜻하는데, 80년대 변신 로봇 붐의 영향을 받은 설정입니다.

개인적으로 아스란의 기체들은 변형 기능이 있긴 한데, 실전에서 그렇게 쓸모 있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이지스는 그나마 포격 형태로 변형하거나 스트라이크를 포획해서 자폭하는 장면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나중에 타는 세이버나 인피니트 저스티스 같은 기체들은 변신해서 전투가 훨씬 유리해지는 장면을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이지스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내장형 스퀼라 에너지 포 4문 - 변형 시 강력한 화력 지원
  2. 넓은 색적 범위와 통신 능력 - 지휘관기로서의 정보 수집 기능
  3. 빔 사벨과 실드 - 근접 전투 대응
  4. X300 프레임 - 생산성과 정비성은 떨어지지만 고성능

아이러니하게도 이지스는 지휘관기인데 무장 구성은 일격이탈(Hit and Run) 전술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넓은 색적 범위로 정보를 수집하고 지휘해야 하는 기체가, 정작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해야 제 성능을 발휘한다는 모순이 있죠. 스트라이크를 상대할 때는 적의 수가 적어서 괜찮았지만, 나중에 세이버를 타고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이 구조적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고뇌하는 군인, 유능하지만 얼빵한 남자

아스란 자라는 코디네이터(Coordinator) 중에서도 최상급 유전자를 가진 인물입니다. 코디네이터란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 신인류를 뜻하는데, SEED 세계관에서 내츄럴(자연 출생 인류)과 코디네이터의 갈등이 전쟁의 핵심 원인입니다. 아스란의 아버지는 플랜트 의장 패트릭 자라였고, 덕분에 아스란은 최고급 유전자 개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C.E. 70년 '피의 발렌타인' 사건에서 어머니 레노아를 잃은 아스란은 군인이 되어 평화를 지키겠다고 결심합니다. 사관학교에서 모든 과목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크루제 부대에 배속되어 이지스 건담의 파일럿이 됩니다. 제가 봤을 때 아스란은 유능한데 어딘가 얼빵한 구석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실제로 코디네이터들 모두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어딘가 결핍된 인간들이라는 설정이 SEED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아스란은 감정 표현에 서툴고 무의식적으로 남을 가르치듯 말하는 습관이 있어서, 동료인 이자크 쥴이나 디아카 엘스만과 자주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자크는 아스란에게 열등감을 느꼈는데, 자프트의 유전자 퀄리티가 부모의 재력과 권력에 따라 결정되는 설정 때문에 이자크의 콤플렉스가 더 심화되었죠. 솔직히 저는 처음에 이자크가 아스란한테 왜 저렇게 까칠하게 구는지 이해 못 했는데, 나중에 설정을 알고 나서야 납득이 갔습니다.

아스란이 재미있는 캐릭터인 이유는, 그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줄곧 고민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키라에 대한 우정과 임무 사이에서 흔들렸고, 변해버린 아버지의 복수심을 걱정했으며, 카가리와의 만남으로 방향을 바꿨다가도 다시 아버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자프트로 돌아갑니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끝나지 않는 증오를 보며 절망하는 장면은, 아스란이라는 캐릭터의 비극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팔랑귀인가, 심사숙고형 인간인가

많은 사람들이 아스란을 두고 "팔랑귀", "엉덩이 가볍다"고 평가합니다. 진영을 자주 바꾸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스란의 모든 선택은 심사숙고 끝에 나온 결정이었습니다. SEED에서 그는 키라를 쏘기를 계속 망설였고, 니콜이 죽은 뒤에야 각성해서 키라와 격돌합니다. 그 과정에서 운 없는 톨 코네가 희생되었고, 아스란은 키라를 죽였다고 생각하며 이지스와 함께 자폭합니다.

그 뒤 카가리를 만나 대화하며 성장하고, 범죄자가 된 라크스를 만나 저스티스를 받아 탑니다. 이 모든 과정은 즉흥적인 게 아니라, 아스란이 자신의 신념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키라가 이지스 자폭 이후 데스티니까지 마치 보살이나 성인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아스란은 계속 인간적으로 고뇌하고 변화합니다. 저는 이 점 때문에 아스란에게 훨씬 더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시드 데스티니에서도 그는 계속 고민했습니다. 자프트에 돌아와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신 아스카를 보며 "이게 과연 옳은가" 되묻고, 키라를 설득하려 했지만 키라는 듣지 않았죠. 시장판을 보고 나서 저는 키라가 아스란에게 했던 "카가리가 울고 있어!"라는 말이 얼마나 비겁한 답변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논리적으로 밀리던 키라가 아스란의 약점인 카가리를 들먹이며 감정에 호소한 것이니까요.

아스란은 주인공을 바꿔도 이야기가 성립될 정도로 서사적으로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키라와 신 아스카는 각각의 작품에서 주인공이지만, 둘 다 아스란과 합쳐져야만 진짜 주인공으로 기능합니다. 아스란은 본래 교사나 정치가가 되었어야 할 인물인데, 전쟁 때문에 군인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재정의해야 했습니다. 오노고로 섬 전투에서 키라를 구하는 장면이나, 작전 훈련을 받은 군인으로서 키라를 보완하는 모습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아스란 자라라는 캐릭터는 건담 SEED가 단순한 로봇 애니메이션을 넘어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이념의 대결'을 그린 작품임을 증명합니다. 각 캐릭터의 서사가 쌓이면 어느 쪽이든 동정과 이해가 생기게 되는데, MBTI로 치면 T 성향이 강한 아스란에게서 그의 과거와 친구 니콜의 죽음을 알게 되면, 왜 그가 키라를 여러 번 만나고도 망설였는지, 왜 니콜의 죽음에 그토록 분개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크스와 카가리 사이의 '환승 연애' 같은 로맨스는 좀 요상하긴 하지만요.

저는 건담 시리즈 중에서도 SEED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복잡한 인간 군상 때문입니다. 아스란은 그중에서도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이고, 그가 탔던 이지스, 저스티스, 세이버, 인피니트 저스티스 같은 기체들은 모두 그의 고뇌를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변신 기능이 실전에서 크게 쓸모없어 보였던 것도, 어쩌면 아스란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모순—유능하지만 방향을 잃고 헤매는—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드 데스티니에서 포지션이 아쉽긴 했지만, SEED에서만큼은 아스란이 키라 못지않게 스토리 진행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Hfd28BAiJM
아스란 자라, 기동전사 건담 SEED, 이지스 건담, 샤아 아즈나블, 건담 라이벌, 저스티스 건담, 패트릭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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