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에피온 (패자의 건담, 근접전 특화, 트레이즈의 이상)

건담 W를 보다 보면 후반부에 갑자기 등장하는 붉은 기체가 있습니다. 바로 에피온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인공 측 신형 건담은 압도적 화력과 원거리 무장으로 무장하는데, 에피온은 사격 무기가 단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이질적입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 '패자를 위한 건담'이라는 설정이 솔직히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런데 제작 배경과 트레이즈의 사상을 알고 나니, 이 기체가 왜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는지 비로소 납득이 갔습니다.

패자의 건담, 에피온의 탄생 배경

에피온(Epyon)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epomeno'에서 유래했으며, '다음' 또는 '다음 세대'를 의미합니다. 코드명 OZ-13MS에서 13이라는 숫자는 12개 별자리에 속하지 않는 존재, 즉 트레이즈 크슈리나다 자신을 상징합니다. 트레이즈는 OZ 수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룩셈부르크 성에서 5기의 건담, 톨기스, 윙 제로 데이터를 모두 활용해 에피온을 비밀리에 제작했습니다.

제 경험상, 건담 시리즈에서 제작자의 사상이 기체 설계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반영된 경우는 드뭅니다. 트레이즈는 튜바로프 빌몬이 추구하는 MD(모바일 돌) 전쟁, 즉 무인 병기가 주도하는 전쟁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인간의 의지와 명예가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에피온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형 MS는 최신 화력과 다목적 운용을 위해 설계되지만, 에피온은 오직 근접 결투만을 위한 기체로 만들어졌습니다.

에피온은 윙 제로의 안티테제(Antithese)로 설계되었습니다. 안티테제란 어떤 명제에 대립하는 반대 명제를 뜻하는데, 윙 제로가 가장 오래된 프로토타입이라면 에피온은 가장 현대적인 기체입니다. 윙 제로가 조종사를 강제로 승리하게 만든다면, 에피온은 조종사가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도록 돕는 MS입니다. 두 기체는 거대한 날개, 가변 변형 능력, 유사한 시스템 원리를 공유하지만 그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근접전 특화, 에피온의 무장과 성능

에피온의 가장 큰 특징은 사격 무기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트레이즈는 에피온을 '전투 무기'가 아닌 '결투 무기'로 설계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근접 무장만 갖췄습니다. 등 오른쪽에는 거대한 빔 소드(Beam Sword)가 내장되어 있으며, 이는 발전기에 직접 연결되어 다른 MS의 백업 무기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고출력 모드에서는 검의 사정거리가 MS 전장을 초월하며, 실제로 우주 요새 바르지를 일격에 파괴하거나 리브라 블록을 절단하는 위력을 보여줬습니다.

양 손목에는 건다늄 합금(Gundanium Alloy) 재질의 에피온 클로(Epyon Claw)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건다늄 합금이란 건담 W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한 장갑 재질로, 일반 MS의 공격으로는 손상시키기 어렵습니다. 왼팔에는 같은 재질로 제작된 에피온 실드가 있으며, 실탄과 빔을 모두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합니다. 방패 앞에 달린 히트 로드(Heat Rod)는 관절형 채찍으로, 열을 발생시켜 건다늄 합금조차 녹일 수 있으며 MA 형태에서도 사용 가능합니다.

에피온은 윙 제로처럼 변형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공식 카탈로그에서는 'MA 형태', 블리츠 데이터 컬렉션에서는 '버드 폼', 프로즌 티어드롭에서는 '와이번 모드'로 불립니다. 버드 폼(Bird Form)은 고속 비행 시 항력을 감소시키고 장시간 비행을 위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솔직히 이 변형 기믹은 저도 처음엔 과시용인 줄 알았는데, 실제 애니메이션에서 에피온이 대기권 돌파나 장거리 이동 시 이 형태로 변형하는 모습을 보면 실용성이 상당합니다.

  1. 빔 소드: 발전기 직결, 우주 요새 파괴급 출력
  2. 에피온 클로: 건다늄 합금 재질 손목 장착형 발톱
  3. 에피온 실드: 실탄·빔 방어 가능한 초강화 방패
  4. 히트 로드: 건다늄 합금도 녹이는 가열식 채찍
  5. 버드 폼: 고속 비행 및 에너지 절감형 변형 모드

종합 전투 능력은 윙 제로와 동등하며, 특히 백병전에서는 윙 제로와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MS입니다. 저는 처음에 장거리 무기가 없다는 점을 결함으로 봤는데, 실제로는 트레이즈가 의도한 '결투'라는 개념에 완벽히 부합하는 설계였습니다. 패자를 위한 기체라는 상징성과 달리, 성능 자체는 괴물 같았습니다.

트레이즈의 이상과 에피온 시스템

에피온의 핵심은 바로 에피온 시스템(Epyon System)입니다. 이는 상황을 분석 및 예측하여 조종사에게 승리 방법을 알려주는 컴퓨터 시스템인데, 원리는 윙 제로의 제로 시스템(Zero System)과 동일합니다. 제로 시스템이란 모든 전투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계산해 최적의 승리 경로를 조종사 뇌에 직접 주입하는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과도한 정보 주입은 조종사의 정신 붕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차이점은 인터페이스입니다. 윙 제로는 조종석 전체가 시스템과 연결되지만, 에피온은 독자적인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인 데이터 헬멧(Data Helmet)을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시스템이 강력할수록 조종사와의 접촉면이 넓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에피온의 헬멧 방식이 오히려 조종사에게 더 강렬한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히이로가 에피온 시스템에 먹혀 정신을 잃을 뻔한 장면이 그 증거입니다.

트레이즈는 에피온 시스템을 통해 조종사가 싸워야 할 적과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정표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에피온을 타고 히이로 유이가 새로운 시대의 리더가 되기를 바랐지만, 히이로는 시스템에 통제당해 전쟁의 부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스템 과부하로 젝스 마키스와의 전투가 끝난 후, 히이로는 젝스에게 에피온을 넘기고 윙 제로를 받습니다. 재밌는 건, 에피온은 젝스 마키스에게 딱 맞는 기체였다는 점입니다. 피스크래프트가의 왕자이자 이상가, 정치가, 지휘관이었던 젝스는 트레이즈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출처: Gundam Wiki).

저는 개인적으로 트레이즈가 에피온을 '패자를 위한 건담'으로 만든 이유가, 자신이 결국 전쟁에서 지고 죽을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는 타락한 전쟁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에피온을 창조했고, 승자와 패자 모두를 축복하는 MS로 남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트레이즈는 마지막에 톨기스를 타고 히이로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스스로 패배를 선택합니다.

에피온을 둘러싼 논란과 아쉬움

솔직히 에피온은 여러 면에서 뜬금없는 기체였습니다. 건담 W는 중후반부터 정신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유폐된 트레이즈가 갑자기 만들어서 히이로에게 줬다가, 히이로가 젝스와 기체를 교환했다가, 젝스가 화이트 팽의 상징으로 삼았다가 하는 과정이 너무 왔다 갔다 합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패자를 위한 건담이라는 콘셉트도 아이러니합니다. 히이로가 에피온을 갖고 생크 킹덤 편에 섰을 때는 생크 킹덤이 박살났고, 젝스가 에피온을 들고 화이트 팽에 참가했을 때는 화이트 팽이 박살났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에피온은 '파괴왕 기믹'을 가진 셈입니다. 젝스는 최종 결전에서 히이로의 윙 제로에 패배하고, 리브라 엔진을 자폭시키려는 히이로를 막은 후 에피온와 함께 '패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건담 W의 제작 환경이 엉망이었다는 점도 에피온의 취급에 영향을 줬을 것입니다. 2기 오프닝은 최종 확정 불과 3화 전에 완성되었고, 최종 컷에서 세트에도 없는 발칸포를 쏘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보면 현장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짐작됩니다. 이는 감독 부재를 메우려는 작가들의 즉흥적 대응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인지 에피온은 디자인은 멋지고 색도 독특하지만, 애니메이션 내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카토키 하지메가 리디자인한 '패자들의 영광' 버전 에피온은 다른 건담과 달리 다음 작품을 위해 디자인되어 시간상 가장 최신입니다. MA 형태로 변형 시 머리 두 개 달린 용으로 변신하며, 날개 전개 기믹, 형태의 미묘한 변화, 방패에 히트 로드 수용, 빔 샤벨 에너지 공급 케이블 분리 등 디자인과 설정이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밀리아르도(젝스의 본명)가 화이트 팽에 입대하면서 '슈트룸 운트 드랑'이라는 추가 장비도 생겼습니다. 디펜더 모드에서는 메르쿠리우스의 플래너 디펜스를 개조한 에너지 필드를 발산해 윙 제로의 트윈 버스터 라이플 풀 파워를 막을 수 있고, '츠바이핸더 모드'에서는 블레이드 길이가 50미터까지 늘어납니다.

프라모델 제품화도 늦었습니다. 윙 건담 TV판 MS들은 OVA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초기 모델들은 색 분할과 가동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변형 및 격투 MS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약했죠. 2010년에야 MG로 제대로 된 제품이 나왔고, 2023년에는 RG가 출시되었습니다. RG는 TV판을 기반으로 하지만 MG 버전의 카토키 디자인 요소를 많이 통합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RG 에피온 현장 런칭에 가봤는데, 일반적으로 인기 기체는 금방 품절되지만 에피온은 의외로 재고가 꽤 있더군요. 시기가 너무 지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정리하면, 에피온은 제작자의 사상과 기체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MS입니다. 겉으로만 봐도 트레이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무장과 외장을 갖췄지만, 애니메이션 후반부의 난잡한 전개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비운의 기체라고 생각합니다. 리메이크가 됐으면 좋겠지만, 최근 건담 시리즈의 제작 방침을 보면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14-0EXk8NrQ https://gundam.fandom.com/wiki/OZ-13MS_Gundam_Ep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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